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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택시 운전사 영화 김사복 기사님의 이야기 ( ft. 넷플릭스 영화 추천 )

by 서아쌤 2023.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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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운전사 실화를 바탕으로 한 김사복 선생님 이야기


택시 운전사 영화는 김사복 선생님의 실제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영화이다. 정말 김사복이름이 맞는지 살아계신지 알 수는 없지만 실제 존재하셨던 인물은 맞고 이분으로 인해 광주민주화운동이 세계에 알려질 수 있었다.


만섭은 서울에서 개인택시 운전기사를 하고 있다. 만 섭은 딸이랑 둘이 살고 있는데, 가진 돈이 없어 딸이 주인집 아들한테 맞았는데 아무런 항의 도 못하고 내려온다. 그리고 '아내가 출산할 것 같다며 빨리 가달라'는 손님을 받았는데, 손님이 돈이 없다. 택시 운전사 만 섭은 오늘 하루도 순탄히 흘러가지 않는다. 만 섭은 운전을 하다가 학생들이 시위를 하고 경찰에게 진압을 당하는 장면을 본다. 그리고 만 섭은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 하며, "공부나 열심히 할 것이지"를 시전 한다. 그리고 기사 식당에서 세 들어 살고 있는 집의 주인이자 같은 택시 운전사 동료와 함께 밥을 먹는다. 그런데 갑자기 맞은편 자리에서 다른 택시 기사가 어떤 외국인 손님을 광주까지 태워주면 10만 원을 받는다는 소리를 한다. 만 섭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먹던 밥을 뒤로 한채 바로 그 외국인 손님을 낚아채러 나간다. 우여곡절 끝에 만 섭은 외국인 손님을 택시에 태운다. 그런데 만 섭은 사실 영어를 못한다. 하지만 만 섭은 의기양양하게 "광주? 돈워리 돈워리 아이 베스트 드라이버"를 말하며 자기를 소개한다. 그렇게 해서 만 섭은 이 외국인 손님과 광주로 향하게 된다.
그런데 만섭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 지금 광주는 독재정부에 의해 모든 길이 군에 의해 막혀 있고, 이 외국인 손님은 독일에서 이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온 기자이다. 세상에 쉽게 벌 수 있는 돈은 없다고 했던가, 만 섭은 10만 원을 쉽게 벌려다가 엄청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만 섭은 광주로 가는 길에 외국인 손님과 함께 검문을 받는다. 그리고 광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자, 만 섭은 외국인 손님에게 위캔고를 시전 한다. 하지만 외국인 손님은 과주로 데려다줘야지 돈을 줄 수 있다고 한다. 이에 곤란한 만 섭은 어떻게든 위회 해서 외국인 손님을 데리고 광주로 향한다.
만 섭과 독일 기자인 피터가 광주에 도착했을 때, 광주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거리는 황폐화되고, 다친 사람들이 길가에 누워있었다. 그때 당시 정부가 모든 뉴스나 신문을 통제하고 있어, 서울에 살던 만 섭은 이런 상황을 몰랐다. 처음에 만 섭은 이런 일에 끼고 싶지 않아, 외국인 손님을 버리고 도망을 가려고 한다. 하지만 얼떨결에 다시 독일기자 피터와 만나게 되고, 그의 취재를 돕게 된다.
이전에 서울에서 시위를 하는 대학생들을 보고 '공부나 열심히 할 것이지'를 시전했던 만섭, 하지만 광주에서 정부가 하는 짓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광주 시민들과 밥을 먹고 하루를 보내다 보니 그의 마음속에서도 '이것은 잘못됐다'는 것을 울 말하고 있다. 만 섭은 집에 있는 어린 딸을 생각하며, 이른 아침 서울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독일 기자 피터가 괜찮다고 말했지만, 만 섭도 옳은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래서 만 섭은 서울로 가는 길에서 다시 유턴하여 광주로 향하게 된다. 그래서 만 섭은 독일기자 피터를 태우고 광주 곳곳을 영상으로 담는다. 그런데 정부에서 곧 외국인 기자가 광주의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곤 정부는 바로 독일 기자 피터를 찾기 위해 광주를 통제하고, 모든 군인들에게 '외국인 손님을 태운 서울 택시를 반드시 잡아라'라고 명령한다.

택시 운전사 속의 독일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5.18 민주화운동이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20일 오후 그는 전라남도 광주시에 잠입했다. 5월 19일 오전, 힌츠페터는 일본 언론 보도를 듣던 중 '계엄령하의 광주에서 시민과 계엄군 충돌'이라는 짤막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힌츠페터는 그 전날 한국군 계엄사령부의 계엄령 선포 등 여러 가지 정황을 봤을 때 평범한 사건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한국에 여러 번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제대로 연결이 되지않자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에 힌츠페터는 2시간 만에 짐을 싸서 같은 방송국의 녹음 담당 기자인 헤닝 루모어와 함께 5월 19일 오후 직접 서울로 향했다. 이는 21이 되어서야 광주로 향한 대부분의 외신 기자들보다 훨씬 빠른 것이었다.
당시의 외국 기자들은 한국에서 취재하려면 국가홍보원에 신고해야 했지만, 그는 과주 취재허가를 받는 것이 불가능하리라 예상했기에, 아예신고를 하지 않고 몰래 잠입한다. 서울로 도착한 힌츠페터와 루모어는 조선호텔에 숙박하고, 5월 20일 오전 외국인 전용 호텔택시 기사 김사복과 함께 택시를 타고 광주로 내려갔다. 서울을 벗어나는 순간 제지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고속도로에 들어선 순간 아무 일도 없었다. 광주로 가는 중, 광주로 통하는 도로를 달리는 차가 자신들 말고 단 1대도 없다는 것을 보고 불길함을 느껴 그 휑한 도로를 촬영애 두기도 했다. 하지만, 광주로 통하는 길목은 달라서 검문소에서 군인들에게 제지당했다. 힌츠페터 일행은 5~10km를 우회하여 마침내 작은 마을과 젊은이들을 만나게 되었고, 힌츠페터는 청년들이 탄 트럭에 올라타고 시내로 들억나다.
그 결과 광주의 참상이 그의 컬러 필름에 고스란히 담겨 현재까지 보존되었다. 힌츠페터는 종군기자로 활동한 적도 있었지만 5.18 광주민주화운동 정도로 비참한 광경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학살 현장과 병원을 찾아다니며 비디오로 찍으면서, 그는 가슴이 꽉 막히고 흐르는 눈물 때문에 촬영을 가끔씩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슬픈데도 촬영을 하는 자신을 혐오하지 않으려고 노렸했다. 자료를 모아야 하니까 슬픔과 참담하고 압도당하는 느낌을 뒤로하고 계속 찍을 수 밖에 없었다. 슬퍼하기만 했다면 자료를 많이 모으지 못했을 것이라고 그는 훗날 말했다. 한편 광주시민들은 계엄군의 삼엄한 봉쇄망의 빈틈을 뚫고 들어온 외신 기자를 열렬히 환영했다.
사실 힌츠페터뿐만이 아니라 외신 기자들은 한국 기자들에 비해서 모두 다 큰 환대를 받았다. 한국 언론들은 취재도 힘들도 해봤자 검열 때문에 제대로 보도가 나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폭도들이라고 왜곡하는 기사가 나올 뿐이다. 그리하여 한국 기자들은 출입이 금지된 전남도청으로 외신기자들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광주에 체류하고 있었던 외국인들이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평화봉사단 직원들을 만나 사태 초기의 상황에 대해 전해 듣게 된다. 이때 건물 옥상에서 이들과 함께 찍힌 사진이 유명하다. 또 그다음 날 새벽 4시경, 그는 멀리서 총성이 들려오자 재빨리 카메라를 켜고 소리를 담기도 했다. 아침이 되어 총에 맞아 숨진 두 사람의 시신을 보고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됐다.
힌츠페터와 루모어는 만 하루 동아나 취재를 한 후 21일 오후 광주를 빠져나왔다. 이때 검문을 피하기 위해 1등석에 탑승했으며, 공항에서의 필름 압수를 피하기 위해 일부는 허리띠에 넣어 몸에서 떼어놓지 않게 숨겼다. 그리고 일부는 당시 서울신라호텔에서 팔던 로열단스크사의 파란색 버터 쿠키통 속에 숨겼다. 22일 오전 힌츠페터만 혼자 광주에서 서울을 경유해 비행기를 통해 나리타 국제공항으로 갔고, 필름은 도쿄 나리타 국제공항에서 곧장 모국인 독일로 보내졌다. 검문을 뚫고 가는 데 시간이 걸려 21일 밤 11시에 서울에 도착했다. 나리타 국제공항에서 필름을 넘겨주고 곧장 돌아온 힌츠페터는 23일 계엄군이 일시 퇴각한 상태의 광주로 또 잠입하면서 시민 자치하의 광주의 모습을 추가로 촬영했다. 이번에는 김제에서 택시를 타고 갔으며, 외국 회사 주재원으로 위장하고 "광주에 남아 있는 회사 부장을 빼오겠다"면서 군인들을 속여서 광주로 진입할 수 있었다. 고급 차량과 외국인 두 명 그리고 호텔 택시기사였기에 속일 수 있었다. 이 필름은 도청 앞 분수대에서의 규탄 대회 등을 제외하면 생각보다 평온했던 시민들의 일상을 담았고, 힌츠페터가 될 수 있는 대로 모은 광주 상홍을 보도한 외국 신문이 대자보처럼 붙여지고 관심을 갖고 이 앞에 모여든 시민들의 모습이나 약탈이나 물자 부족 같은 것 없이 음식이 가득한 시장 상황, 계엄군 측과 협상하기 위해 애쓰는 수습위원회 위원들 등을 담고 있다.
힌츠페터의 취재와 영상자료는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날조하려는 시도를 저지하고 오늘날의 평가를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택시 운전사 영화의 주인공 실제인물 김사복 선생님


<택시운전사> 개봉 3일 후 한 사람이 트위터를 통해 자신이 김사복의 큰 아들이라고 밝히면서 화제가 된 동시에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김사복이라는 이름은 영화 속 설정처럼 가명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본명 그대로였으며, 1984년에 암으로 투병하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이에 언론사, <택시운전사>의 제작사는 접촉 의사를 보였다. 이후 <택시운전사> 제작진에게 아버지 사진을 전달했고, 확인 절차를 거친 이후 힌츠페터 기자의 유가족과 만날 예정이라고 트윗을 통해 밝혔다.
김사복의 큰아들 김승필 씨의 주장에 따르면 그동안 위르겐 힌츠페터 와제작진, 언론사 등이 택시운송사업조합, 개인택시운송사업조합, 도로교통공단을 수소문하고도 찾지 못한 이유는 김사복이 일반 택시 우전사가 아닌 호텔택시 운전사였기 때문이다. 즉, 택시운송사업조합에서 발급하는 자격증이 아예 없는 상태였다. 당시에는 호텔에 소속되어 손님을 목적지까지 태워주는 호텔택시라는 것이 있었으며, 주로 외국인이 이용했다. 실제 김사복은 영어를 잘해서 많은 외신 기자들이 단골로 삼았다고 한다. 김승필 씨는 힌츠페터가 외신기자를 통해 부친을 소개받아 김포공항에서 바로 광주로 향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또한 광주를 다녀온 날 사람들이 죽는 모습을 보고 괴로워하며 집에서 술을 마셨으며, 훗날 아들에게 들어갈 때도 힘들었지만 나올 때는 더 힘들었는데 군인 중 하나가 알고도 보내준 거 같다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고 전했다.
김승필 씨의 주장과 부합하는 측면이 힌츠페터 기자의 회고에서도 나오는데,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는 자신이 광주로 갔을 때 타고 간 택시가 오펠차라고 회고한 바 있다. 오펠차는 한국에서 조립한 새한 레코드로 추정되는데, 김승필 씨의 주장대로 김사복이 외국인을 주로 상대하던 호텔택시 운전사였다면 당시 일반적인 택시로 쓰였던 호니나 기아 브리사가 아닌 최고급 차량인 새한 레코드를 운전했을 수 있다. 김승필 씨의 주장에 의하면 김사복은 호텔택시 2대와 자기 명의의 자가용을 소유했다고 하는데,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처음 광주로 갔을 때 타고란 차량은 포드 20M 차로 보이고, 2차로 광주로 들어갔을 때는 새한 레코드차를 타고 들어갔다고 한다. 이런 부분도 김승필 씨의 주장과 맞물리는 측면이다. 또 김승필 씨가 아버지의 택시가 일반 택시가 아니라 고급 세단이었다고 회고한 것은 처음 광주에 들어갈 때 힌츠페터가 말한 '한국에 비즈니스로 온 외국 회사원인데 부장과 광주에서 길이 엇갈려 데리러 간다.'는 이야기가 계엄군에게 통했던 것과 정황상 인과관계가 성립한다. 그래서 정리해 보면, 군인들도 수색을 하려 해도 비싼 고급차에 흠집이라도 나면 큰일 나기에 함부로 수색할 수 없었고, 김사복 씨는 호텔택시기사이며, 고급차를 탄 사람도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인데 가다, "비즈니스 때문"이라는 거짓말이 통하고, 그리고 군부가 곧 잡으러 올 거란 두려움에 떨었던 본인의 예상과는 달리, 신군부는 끝까지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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