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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덕혜옹주 영화 역사적 고증오류 (ft. 티빙 영화 추천 )

by 서아쌤 2023.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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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영화 줄거리 결말 이야기

1961년, 서울신문의 기자 김장한은 일본에서 덕혜옹주가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이 소식을 들은 뒤 잠시 덕혜옹주에 대해 회상한다.
1919년, 고종의 외동딸 덕혜는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낸다. 아들 영친왕을 일본에 볼모로 보낸 고종은 덕혜만은 지켜주기 위해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의 혼례를 추진한다. 고종은 남몰래 어린 김장한을 불러들이고, 어린 덕혜는 이때 고종에게 인사하러 온 장한을 처음 만난다. 혼례가 무사히 성사되면 덕혜가 일제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어느 밤 고종이 독이 든 수정과를 마시고 독살된다. 어린 덕혜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여주러 갔다가, 아버지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고 충격에 빠진다.
시간이 흘러 1925년, 14살이 된 덕혜는 소년이 된 장한과 다시 만나고, 피아노 연주를 함께 하는 등 잠시 풋풋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덕혜는 친일파 한택수가 행사에 입을 기모노를 보내자 자신은 양장을 입고 받은 기모노는 복순이에게 입히면서 저항하는 등 꽤나 당찬 면모를 보이는 아가씨다. 동요를 지어 고아들에게 가르치고, 아이들을 돌보고, 한글을 가르치고 싶다고 하는 등 애국심 굳은 황녀로 성장한 듯하다. 다만, 한택수가 이런 덕혜를 위험인물이라 하여 일본으로 보내려 한다는 것이 문제다.
덕혜는 황실의 일원으로 인정받음과 동시에 일본으로 강제로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귀인 양 씨는 일본으로 떠나는 덕혜에게 보온병을 주며, '물 한 모금도 함부로 마시지 말라'라고 당부한다. 덕혜가 침울한 표정으로 궁을 나서면서 화면이 전환된다.
다시 시간은 1961년, 취재를 위해 일본에 들른 김장한은 과거 독립운동을 함께 한 동료 복동을 만난 뒤,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이 된 영친왕의 개인 저택에 들러 다시 한번 덕혜에 대해 떠올린다.
시간이 흘러 성숙한 여인이 된 덕혜는 도쿄에 있는 오라버니 영친왕의 저택에서 지낸다. 공부를 마치고 조선에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렸지만, 한택수는 귀국을 차일피일 미룰 뿐이다. 낙담에 빠져있는 덕혜에게 성인이 된 장한이 찾아온다. 사관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한 장한은 한택수에게 아부를 떠는 듯한 모습을 보여 잠시 덕혜의 반감을 사지만, 그도 사실은 이우와 함께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었다. 황실 가족 모임에서 덕혜를 찾아온 이우는 고모 덕혜를 조선으로 돌려보내주겠다고 약속한다. 덕혜를 조선으로 보내려는 비밀공작이 시작되지만, 한택수가 독립운동기지를 덮쳐 무산되고, 결국 덕혜는 장한과 함께 어렵사리 탈출하여 영친왕의 궁전으로 돌아온다.
장한은 덕혜를 위로하기 위해 레코드판을 선물하고, 생모 양 귀인의 편지도 전해 준다. 덕혜는 외로운 타향살이 중 장한을 조금씩 의지하게 된다. 그러던 중, 귀인 양 씨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한택수는 '친일 연설을 하면 조선을 방문하게 해 주겠다'며 회유한다. 덕혜는 어머니를 보고 싶은 마음에 조선인 노동자 앞에서 친일 연설을 읽기 시작하지만 결국 끝까지 읽지 못하고, 조선인 노동자들을 격려하는 말을 한다. 황족으로서 자신의 무력함을 탓하면서 조선인 노동자들을 진정 위로하는 말에 노동자들은 진심으로 감격하면서, 자신들을 조선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항의한다. 거세진 항의에 연설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한택수는 이일로 덕혜의 뺨을 후려친다. 한택수를 가까스로 말리는 김장한의 모습이 압권이다. 영친왕의 궁으로 돌아온 덕혜는 머지않아 귀인 양 씨의 부고를 듣고, 마침내 상하이 망명을 결정한다.
덕혜와 이우, 장한은 영친왕을 설득하여 상하이 망명을 계획한다. 일본인 고위 장관들이 모이는 기원절 행사에서 김봉국이 폭탄을 터뜨리면 영친왕과 장한이 탈출하고, 덕혜와 마사코가 합류하여 상하이로 떠나는 것. 영친왕이 복통을 호소하며 자리를 비운사이, 봉국이 무사히 폭탄을 터뜨리고 행사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한편, 덕혜는 마사코, 소 다케유키와 드레스를 고르러 간 자리에서 마사코에게 드레스 갈아입는 것을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옷을 갈아입으러 간 방에서 덕혜는 마사코에게 영친왕의 망명 계획을 알린다. 마사코는 영친왕이 자신에게 망명 계획을 알리지 않았을 리 없다며 떠나지 않으려 하지만, 망설일수록 영친왕이 위험해진다는 덕혜의 말에 결국 따라나선다. 이렇게 영친왕과 덕혜의 상하이 망명은 성공한 듯싶었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영친왕이 망명을 거부하면서 작전은 물거품이 된다. 그리고 또다시 한택수가 은신처를 덮치면서 영친왕과 마사코가 먼저 붙잡히고, 덕혜는 장한과 함께 어렵사리 탈출한다.
장한과 덕혜는 시즈오카 현 모처에 있는 산속의 독립운동 기지로 피신하고, 그곳에서 함께 며칠을 지낸다. 덕혜는 장한의 총상을 치료해 주고, 장한이 위험해지자 꼭 끌어안고 함께 밤을 지새우는 등 약간의 로맨스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렇게 복동과 약속한 날이 되어 덕혜의 상하이 망명이 성공할 것처럼 보였으나 일본군의 기습으로 두 사람은 위험에 처한다. 장한은 덕혜를 비밀 통로로 먼저 내보내고, '저에게 10분만 주십시오. 10분 후에 반드시 옹주님을 찾을 겁니다.'라고 말한다.
덕혜가 비밀 통로를 통해 해안가로 달리는 사이 장한은 숨겨둔 총과 폭탄으로 수많은 일본군을 상대한다. 한편, 해안가로 달려간 덕혜는 배를 끌고 오는 복동과 만나고 멀리서 장한이 덕혜를 향해 달려오며 감격스러운 포옹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배를 끌고 온 사람은 한택수였다. 결국 장한은 한택수의 총에 맞아 쓰러지고 덕혜는 힘없이 주저앉는다. 덕혜는 소 다케유키와 결혼한다. 결혼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마루에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만 잠깐 비친다. 젊은 다케유키는 덕혜를 위해 조선식으로 식단을 준비하라고 하고, 옆에 앉아 다정히 말을 건네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희망을 버린 덕혜는 마음을 열지 않고, 덕혜는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다.
시간은 다시 1961년으로 돌아와 김장한이 그 장소 그대로 있는 소 다케유키의 집을 찾아온다. 거기에는 늙은 소 다케유키가 살고 있었고 그는 그녀의 일에 대해 묻는 김장한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이지만, 김장한은 집요하게 집안으로 무작정 들어 가서 그녀의 물품을 다케유키의 방에서 찾는다. 그러다 다케유키의 재혼한 부인과 자녀들도 보게 되지만 다케유키는 무작정 지을 뒤지는 김장한을 밀치면서 싸우다 넘어트리게 되고 그가 의족을 차고 있는 걸 보면서 '당신 뭐야'라고 묻는다. 둘은 서로 마주 앉아서 이야기하면서 상황을 설명한다. 다케유키는 '나는 덕혜를 버리지 않았고, 딸 정혜는 나와 덕혜가 이혼한 후 자살했다.'면서 눈물을 흘린다.
영화는 다시 1945년 8월 15일, 소 다케유키 집에서 덕혜는 빨래를 개며 딸 정혜가 덕수궁을 그리는 걸 보면서 '더 빨갛게 단풍이 물들어서 예뻤다. 그래서 엄마는 가을만 오기를 기다렸다'면서 정혜와 그림을 이야기하다 딸 정혜가 '엄마 나 배고파'라고 하자 덕혜는 허겁지겁 밥을 지으러 가다 라디오에서 쇼와 덴노의 옥음방송, 즉 항복 선언 방송을 듣고는 딸 정혜를 끌어안으면서 '일본이 패망했어!! 전쟁에서 졌어!! 이제 조선에 갈 수 있어!!' 하면서 감격이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이후 덕혜는 딸 정혜와 함께 GHQ, 지배 하에 있는 시모노세키 항에서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기다린다. 딸 정혜가 '엄마, 무서워. 집에 가면 안 돼? 아빠는?' 그러자 엄마 덕혜는 '아빠는 잊어. 넌 이제 소 마사에가 아니라 정혜야. 넌 조선인이야.'라고 말하면서 '엄마는 얼마나 기다렸는데, 20년을 기다렸어. 우리가 가면 얼마나 반가워할까!!'라며 들떠 감격한다. 그러다 자신의 차례가 된다. '혹시, 덕혜옹주십니까'라고 심사관이 묻자 덕혜는 '네 제가 맞아요' 하지만 입국 심사관은 '조선 측으로부터 거부를 받았다. 입국거부자 명단에 있다'면서 차갑게 말해 버린다. 놀란 덕혜는 '아니 제가 왜 입국이 거부가 돼요? 이봐요! 전 조선인이에요! 나 조선 사람이라고! 조선인이에요!'라면서 절규하지만 끝내 미군에게 끌려 내팽개쳐 친다.
그런 뒤 그녀에게 부축의 손을 건네는 이가 있었는데 그를 본 덕혜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어이구 옹주 마마! 오랜만입니다.'라고 말하는 그가 중절모를 벗자 한택수임이 드러난다. 한택수는 '세상이 또 바뀌었습니다.' , '조선이 독립을 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 '이 얼마나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면서 웃는다. 앞으로 나가면서 정혜를 보더니 지갑을 열면서 '네가 마사에구나, 많이 컸구나' 하면서 돈을 주려는 찰나 덕혜가 바로 멱살을 잡지만 한택수의 보디가드들에게 다시 한번 바닥을 내팽개쳐진다. '옹주님 제가 예전에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옹주님은 다시는 조선 땅을 밟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 한택수는 절차에 의해 보호받으며 입국한다. 이에 덕혜는 우는 것도 잠시, 격하게 몸을 웅크림과 동시에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드러눕는다. 정혜는 그런 엄마를 무서워하면서 뒷걸음질 치고, 주변 대시하는 사람들도 미쳤다는 듯이 안타깝게 쳐다본다.
시간은 다시 1961년으로 돌아와, 장한은 복동과 같이 옹주가 입원해 있는 정신병원을 찾는 데 성공한다. 간호사에게 간곡한 부탁 끝에 덕혜의 병실 앞에 다다른다. 하지만 이미 폐인이 되어 하염없이 창문만 바라보고 있는 덕혜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이후 1961년 한일기본조약회담의 기자회견 자리에 참석하게 된 장한은, 박의장에게 질의응답 시간에 자신의 차례가 아님에도 마이크를 빼앗아 '대한제국 황족들의 복권과 옹주의 귀국을 허락해 달라'라고 외치다가 경호원들에게 끌려나가고 빈 방에 갇힌다. 그러나 박 의장은 장한을 따로 부르고, 장한의 간곡한 설득에 덕혜의 귀국을 허락한다.
그리하여 장한은 덕혜가 있는 정신병원에 가서 퇴원 수속을 밟고 폐인이 된 덕혜의 보습에 충격을 받는다. 장한을 못 알아보던 덕혜는 장한이 구출 작전 때 덕혜에게 외쳤던 약속을 부르짖고, 덕혜는 기억을 되살리며 장한을 안아준다.
이윽고 어렵게 귀국길에 오른 덕혜는 귀국장에서 자신을 마중 나온 이제는 다 늙어버린 황실의 궁녀들에게 절을 받고 유모 복순과 눈물겨운 재회를 한다. 시간이 흐르고 장한은 이제는 자신의 집이 아니라 관광지가 된 덕수궁에 덕혜와 동행하고, 덕혜는 출입금지 팻말이 붙은 궁 내부를 바라보다 고종과 귀인 양 씨가 자신을 환영하는 환상에 빠진다. 환상 속에서 고종과 양 귀인과 부둥켜안으며 눈물을 흘리는 덕혜에게, 양 귀인은 처음으로 덕혜라고 불러주며 귀환을 환영한다. 이윽고 덕혜가 좋아하는 사이다를 사 온 장한이 덕혜와 담소를 나누며 영화는 끝난다.


덕혜옹주 영화 속 고증 오류

+한 일 강제 병합 후 궁궐 내 남자직원 (내시, 대령숙수 등)은 모두 쫓겨나고 궁녀들만 남았다. 따라서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나는 날 그 앞에서 우는 내시들은 고증 오류다.

+영화 내에서 일본어로 옹주를 부를 때도 옹주의 일본식 발음으로 부르지만, 실제론 덕혜의 일본어 발음을 더해 '도쿠에히메'라 불렸다.

+극 중 직접 출연하지는 않았지만, 남자 주인공 김장한의 아버지의 이름이 김황악이라고 언급되었는데 실제 김장한의 아버지 이름은 김정진으로 김황진의 동생이다.

+고종이 어린 장한을 밤늦게 따로 불러 얘기할 때 자신의 딸을 덕혜라고 부르지만, 실제로 고종은 덕혜옥주가 덕혜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지도 몰랐다. '덕혜'는 고종 사후 2년 뒤인 1921년 5월 4일에 이복오빠 순종황제가 내려준 봉호이기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고종은 덕혜를 '아기'라고 부르는 게 맞겠지만, 극 중 진행 상 아무래도 그냥 '아기야'라고 부르긴 무리였던 듯하다. 실제로 여러 회고록 등을 보면 어린 시절의 덕혜옹주는 그저 '복녕당 애기씨'로 통칭된다.

+덕혜옹주가 조선인 노무자들 앞에서 자신을 조선의 옹주 이덕혜라고 소개하는 장면이 있다. 이를 고증 오류로 생각할 수 있으나 일제강점기에 나온 몇몇 자료들에 덕혜옹주를 이덕혜로 부른 용례가 보인다. 다만, '덕혜'는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본명이 아니라 순종이 내린 작호였고, 1931년 소 다케유키와 결혼하면서 남편의 성에 작호를 붙여 '소 도쿠에'로 불린 것을 시작으로, 1956년 이혼하고 나서 어머니 귀인 양 씨의 성을 따라 양덕혜로 바꾸고 1962년 국적을 회복하여 귀국 하고 나서야 이덕혜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널리 쓰였다. 즉, 이덕혜가 틀린 건 아니다만, 차라리 그냥 덕혜라고만 하는 게 더 자연스러웠다.

+일제강점기라서 예법을 엄격히 따지지 않아 덕혜옹주가 용보 당의를 입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면서 궁중 예법은 황실의 격에 맞게 한층 상승되었다. 왕은 황제가 되었고, 황제의 자식들은 왕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옹주라 해도 왕의 반열에 있기에 덕혜옹주가 용보 당의를 입는 건 황실 예법에 따른 것이다.

+영화 초반부, 덕혜옹주가 기모노를 바꿔치기했을 때, 한택수가 높으신 분들에게 까이는 장면이 있다. 그때, '재선일체를 홍보할 수 있다면서 큰소리쳐놓고 뒤통수를 맞다니'라는 대사를 하는데, 내선일체라는 용어가 제대로 반열에 오른 시기는 1937년부터였다. 덕혜옹주가 유학을 가던 시기는 1925년인데, 이 장면에 나오던 시기도 대략 1925년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렇게 된다면 '내선일체'라는 용어가 무려 12년 전에 나온 셈이 된다.

+마지막에 덕혜옹주가 귀국하는 길 탑승한 비행기가 무려 제트기에 이코노미 3-3-3 배열 광동체기다. 애초에 광동체기 자체가 1969년에 데뷔한 물건이며, 3-3-3 배열이 최초로 적용된 물건도 1995년 나온 보잉 777이다.


덕혜옹주 영화가 실제와 다르거나 가상인 부분

덕혜옹주는 사실과 허구를 적절히 섞은 팩션이므로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고 내용을 공감할 필요가 있다.


+가장 두드러진 허구는 영화에서 가장 극적이고 중요한 장면인 덕혜옹주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와 영친왕과 함께 중국 상하이 망명을 추진했다는 대목이다. 실제로 망명 시도를 한 건 의친왕 이강이다.

+영화에서는 영친왕 부처가 덕혜옹주를 계속 데리고 산 것처럼 묘사하지만 이는 실제와 다르다. 이방자의 회고록에 따르면 일본에 온 직후에는 가쿠슈인에 편입하기까지의 극히 짧은 시간 동안만 함께 살았으며, 가쿠슈인에 다니는 동안 아직 어리고 그동안 여러 일로 충격이 컸을 옹주를 위해 자신들이 데리고 보살피겠다는 영친왕 부처의 요청을 일본이 거절하고 바로 기숙사로 보냈다고 한다. 따라서 그들 부처가 덕혜옹주와 함께 지낸 시간은 귀인 양 씨가 사망한 해의 여름방학까지 포함해도 지극히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덕혜옹주가 가쿠슈인을 졸업했는데도 귀국시키지 않는다고 항의하는 장면이 나오나, 사실 옹주는 이미 이 시점에서 신경쇠약으로 인해 등교 거부 상태였다. 설상가상 졸업 이전의 시점이 더 이때는 이미 정신질환 진단을 받은 데가 혼담까지 오가고 있어 당시에는 가쿠슈인을 끝까지 다니지 못했다. 덕혜옹주가 학업을 마친 건 소 다케유키와 결혼한 이듬해인 1931년의 일이다.

+영화에서는 덕혜옹주가 일본에 처음 간 뒤 1960년대까지 처음엔 친일파 때문에, 나중엔 한반도 정부의 반대로 조선 땅을 한 번도 밟지 못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덕혜옹주가 어머니 귀인 양 씨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1929년 6월 2일 조선에 잠시 귀국한 적이 있다.

+실제 덕혜옹주는 이미 10대 때부터 정신병 증상이 시작되어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닐 정도였지만, 영화에서는 못 볼 꼴을 계속 보고 충격이 누적되면서 세월이 꽤 지나서야 발병하는 것처럼 묘사되었다. 작중에서 그런 묘사가 처음 나온 건, 딸 정혜가 꽤 큰 1945년 이후로 나온다.

+김장한이 행방이 묘연한 영친왕 부처를 추적하여 실종된 덕혜옹주를 수소문하려는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 속 김장한의 해방 이후 후기 행적의 모티브가 되는 김을한의 회고록에 의하면 덕혜옹주가 정신병원에 있는 것을 알려준 건 소 다케유키가 아니라 영친왕으로, 당시 돈으로 월 1만 엔에 달하는 거액의 병원비를 다달이 지불한 것도 영친왕이라고 한다. 전 남편 소 다케유키는 당시 김을한의 전화에 병원에 있다는 사실만 알려주고 끊었다고 하며, 덕혜옹주를 찾기 위해 김을한이 소 다케유키를 직접 찾은 일은 없다고 한다. 참고로 김을한이 덕혜옹주의 행방을 확인한 건 그가 도쿄 특파원으로 건너간 1950년대 초반 무렵이라고 한다.

+소 다케유키와의 맞선과 웨딩드레스를 보러 가는 신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자가 즐거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는 영친왕 부처 모두 자신들에 이어 어린 옹주를 정략결혼의 희생양으로 삼으려 든다며 해당 혼사를 굉장히 불쾌히 여기로 심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특히나 이 시기 이미 몽유병이나 신경쇠약을 비롯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던 옹주를 치료할 생각도 하지 않고 한창수가 자신의 공적을 높이기 위해 결혼을 서둘러 진행한 탓에 옹주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더욱 반대를 해서 어떻게든 혼담을 깨려 노력했다고 한다. 물론 그 결혼 반대는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덕혜옹주는 영화에서처럼 밥을 지으러 가는 일이 없었다. 일본이 패망하기 전 소 다케유키는 귀족이었고, 일제의 귀족은 영화 아가씨에서처럼 기본적으로 저택에서 살며 몇 명의 하인들을 고용한다. 정신병을 앓아온 덕혜옹주는 항시 요양 상태였고, 패망 후에는 보살 펴 줄 하인을 고용할 처지가 못 되어 정신병원으로 보내지기 때문에 제 몸을 건사하지 도 못하는 덕혜옹주가 가사를 했을 거라 볼 수 없다. 더욱이 가사를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딸 정혜의 양육이 가능했을 리가 없는데, 딸 정혜와 평범한 모녀로서의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나오는 것 역시 모순이다.

+덕혜옹주가 조선 옷이 아니란 이유로 기모노를 거부하고 평생 한복과 양장만 입었다는 묘사는 오류다. 옹주가 조선에서 다녔던 히노데 소학교는 일본인 학교였고 기모노 착용이 의무였기때문에 옹주도 기모노를 입고 다녔다.

+윤제문이 배역을 맡은 한택수는 한창수라는 실존한 친일 반민족행위자 매국노 인물을 모티브로 만든 가공의 인물이다. 영화에서 그는 나라를 팔아먹기 위해 온갖 짓거리를 다하고 옹주에게도 온갖 쓰레기짓을 다하는데 그것도 모자라 광복 후에도 뻔뻔스럽게 태연히 조선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최대 발암씬이지만 사실 그가 연기한 과거 진짜 한창수는 광복 12년 전인 1933년에 이미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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